아이랑 같이 신세계 백화점을 가려고 마을버스를 타고 가는데 새로 지은 반포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다. 도저히 사람 사는 분위기가 안 나는, 좁은 땅에 빽빽하게 지어놓아 엄청난 교통체증과 오염을 일으키는 모습이다. 지금 내가 사는 고층 아파트나 내가 20년 전에 살았던 저층 아파트는 그럼 사람 살만한 데냐고 묻는다면... 조금 더 낫다고, 많이 더 나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다. 아파트란 놈이 꼭 필요악처럼 보기는 흉해도 편리해서 살 수밖에 없다고 자조하는 축에 나도 들어가지만, 요즘의 '타워 대세'에는 정말이지 한숨밖에 안 나온다.
그래서 나는 아이더러 '세연아 저거 봐라. 옛날에 삼성 아파트에서 살 때 밤에 보던 번쩍번쩍하던 거다. 근데 쫌 모양이 아니다. 그지?' 했다. 그리고는 곧 친정 아빠의 일상적인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생각나서 허걱했다.
왠지 좀 비판적인, 정면에서는 아니더라도 뭔가 흠을 잡아내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감탄하고 기뻐하는 법이 없는 비판적인 태도. 이것이 결혼후 내가 친정의 문화에서 벗어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시작한 후 갖게 된 '내 가족 문화'의 인상이다. 그 다음에야 나의 비판적인 말투와 태도의 문제점이 절실히 보였다. 그 말투와 태도들 사이로 새어나가는 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상의 비판적인 말투는 결과적으로 삶의 에너지를 깎아먹는다. 무슨 일을 시작도 하기 전에 걱정을 하고 삐뚤게 봐서 김을 빼어놓아 시작을 못 하게 한다. 내 경우를 보면, 시작을 해도 이미 적기에서는 한참 멀어진 다음, '늦-'이라는 접두어 빼고는 무슨 일을 하는 법이 없다. 다행히 끈질기게 붙들고는 있는데, 적기에 확 밀어붙이고 충분히 성장하고 남들한테도 인정받고 스스로도 성숙하고 그럴 만한 뒷심이 없다. 나의 꿈에 대해 '가망없다'고 '이미 늦었다'고 스스로 포기시키는 말들을 끌 수가 없다. 십년이 넘도록.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에서 사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목은 저자가 다른 책에서 본 이야기인, '불행한 부모는 아이의 머리 속에 불행을 프로그래밍한다'였다. 비판적인 부모는 아이의 머리 속에 무엇을 프로그래밍하는가? 분노를 프로그래밍할까? 점점 커지는 문제와 점점 더 멀어지는 해결?
아이는 자기가 비판당할 것이 두려워질 것이다. 비판당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를 것이다. 비판적인 부모가 아이의 머리 속에 프로그래밍하는 것의 본질은 '포기'가 될 것 같다. 사회모순에 대한 분노를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지만, 생각과 행동 사이의 간격을 넓혀서 행동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만, 나를 볼 때 끝까지 남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부작용은 '포기'인 것 같다. 스스로 포기해놓고 나서 억울하고 분하다. 스스로 포기해놓고 나서 다시금 돌아본다. 미적미적하면서도.
나는 고민이다. 나의 말투를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비판을 아예 안 할까? 과연 참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생긴다. 비판을 안 하고 무비판적으로 아이가 모든 것을 그저 일단 긍정의 태도로 바라보게 하는게 좋은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나는 배부른 돼지의 행복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의 의로움이 더 끌리는 성향을 말소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지 어떤지 판단하기 이전에 내가 실행할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전혀 안 보이므로 이것을 한 가지 해답으로 놓을 수가 없다.
일단은 비판의 양을 줄이고 순서를 뒤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되도록 가치판단이 안 들어간 중립적인 서술과 묘사를 선호할 생각이다. 나의 가치판단을 얘기할 때는 '엄마 생각에는...'하고 내 생각이라는 것을 밝히고. 오늘 신세계에 갔다가 아이가 '저거 보고!' 해서 Dior 패션쇼를 디오르 매장에 앉아 조금 민망하고 뻔뻔하지만 십분 정도 보면서 이미 (아들 손에 이끌려) 다섯번은 봤기 때문에 심심한 내가 옷에 대해 서술과 묘사을 하고 나의 품평을 곁들여 보았는데, 괜찮을 듯싶다. (디오르 매장 매니저는 이젠 우리가 들어가도 인사도 안 한다. 민망할까봐 배려해주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좀 사람을 무시하는 것쪽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