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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치아 보르자: 어머니, 당신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음악

도니제티의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 디비디를 보았다. 에디타 그루베로바와 파올로 브레슬릭의 2009년 뮌헨 공연이다.

Com'e bello(얼마나 아름다운지!) 노래가 너무 아름다워서 끌리게 된 오페라다.

나이 많은 그러나 아직은! 아름다운 귀부인이 아름다운 강가에서 천연스레 누워 낮잠을 자고 있는 청년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이 끌린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완벽하게 자신을 사로잡는 이상형을 만나 기뻐하고, 빠져들지만 그가 깨어나 자기를 볼까 두려워한다. 어쩜 이렇게 나이 먹은 여자들의 마음을 잘 꿰뚫고 있나! 나이먹은 여자가 주책이다 라는 소리만큼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것이 (본인 생각엔) 생각보담 괜찮은 나이 먹은 여자의 심정. 이 오페라 왜 한국에 안 들어오나 싶다. 중년 여성들에게 매우 인기있을 것 같은데.

Com'e bello! Quale incanto
In quel volto onesto e altero!
No, giammai leggiadro tanto
Non sel pinse il mio pensiero.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매혹적인지!
이 정직하고 기품있는 얼굴.
지금껏 그 누구도 이토록 아름답게
내 마음을 꿰뚫은 적이 없다.


L'alma mia di gioia e piena,
Or che alfin lo puo mirar ...
Ma risparmia, o ciel, la pena
Ch'ei debba un di sprezzar.


내 영혼이 기쁨으로 가득 차오른다.
이제야 그를 볼 수 있게 되다니!
내 번민을 사하소서, 하늘이여!
일말의 경멸도 받지 않도록!


다행히! 소프라노가 꿈결 같이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른 후 잠에서 깨어난 청년은 귀부인을 보고 첫눈에 반해 사랑을 고백한다. 날 놔달라!고 하면서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는... 중년 여인.

보통 오페라 하면 일단 그 노래 실력이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배불뚝이 테너와 역시 나이를 속일 수 없는 소프라노가 등장하여 젊은이들의 역을 하는 것을 좀 아쉽긴 하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인데, 이 오페라는 다르다. 그럴 수가 없다. 반드시 잘 생기고 젊은 테너가 나와주어야 잠든 젊은이를 바라보며 나이든 여자가 망상을 갖는 장면을 개연성있게 연출할 수가 있다. 왜냐면, 이것은 보통의 성역할에서는 보지 못했던, 즉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브레슬릭은 너무나 개연성이 있는, 젊고 잘 생기고 반짝이는 금발이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심지어 몸매까지 완벽하신... 미모를 갖추고 있어서... 그의 미모를 믿고 연출가가 상체탈의씬을 밀어붙인게 아닐까 싶다.(근데 나는 좀... 좋기는 하지만 좀 많이 민망하다.) 그루베로바가 좀 많이 나이들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설정상 뭐,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굉장히 멋진 커플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거침없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니 바로 자기의 아들인 것!

왜 그가 여자의 가슴을 정통으로 맞춘 이상형이었는지 알만하지 않은가! 나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분신이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루크레치아 보르자라고 하면 희대의 미녀로 소문난 여자. 그 여자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교황의 딸, 그 유명한 체사레 보르자가 그 오빠다. 그 미모의 여동생을 권력투쟁에 이용해 먹기 위해 체사레 보르자가 그녀의 첫번째 혼인을 무효화하고, 또 그녀가 낳은 사생아를 어디로 보내버리고 그 아비로 추정되는 혹은 올가미를 씌운 남자를 죽이고서(그 아비가 실은 체사레 보르자라는 설이 좀 막강하다...) 그녀을 막강한 가문에 시집 보내고, 가문이 기울자 그 남편을 독살해버렸다는... 그래서 남편을 잃고 마지막으로 시집간 것이 아마도 이 오페라의 남편으로 나오는 알폰소 데스테 공작이다. 원래는 마지막 남편과 잘 살다가 아기를 낳다가 죽었는데, 빅토르 위고는 허구로 아들을 등장시켜 비극을 만들었고 그의 희곡을 원작으로 도니제티가 오페라를 만든 것이다.

계급도 가문의 원수도 뭐도 안 나오는, 왠 근친상간 스토리? 핵헐... 선입관과는 달리 극이 상당히 재미있다. 내가 그루베로바와 브레슬릭의 공연을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프롤로그에서 남주와 여주가 처음 만나고 사랑의 이중창을 부르는 대목도 정말이지 멜로디도 아름답고 극도 재미있지만, 1막에서 여주의 남편이 젊은이를 질투하며 어떻게든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하는 대목도 정말 상당히 재미있다. 공작과 공작부인의 불꽃 튀기는 대결도 그렇고,(내 전남편들이 어떻게 하다가 죽었나 생각해 보라는 둥이라든가;;) 첫눈에 반한 여인이 맙소사 친구들의 원수인 그 유명한 루크레치아 보르자라는 것을 알고 난 후의 제나로의 행태도 참 재미있는 것이 딱 반항하는 사춘기 아들 같다. 어떻게든 빼내주려고 애쓰는 공작부인의 노력이 무색하게 자기는 거짓말을 못한다며 자백을 계속하는 대목도 참... 어이없지만 매우 말이 되는 장면이다.

주인공인 두 사람 외에도 오르시니도 매우 멋지다. 메조소프라노라서 여자지만 반할 거 같은... 넘 파워 있으심. 그리고 남편인 공작도 굉장히 재미있는 캐릭터다. 사실 이 비극이 진행되는 것도 본인들은 아무 일도 없는데- 근친상간 근처에도 안 갔는데- 질투에 불타는 남편 때문에 사달이 난 것. 질투도 참 귀엽게 하신다.

그리고... 노래가 정말 아름답다. 도니제티는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도 보면 그런데 아름다울 때는 무지막지하게 아름답다가도, 거칠어지는 장면에서는 또 무자비하게 찌그러뜨려 버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운 벨리니와는 느낌이 꽤 다르다. 아무튼 루크레치아의 Com'e bello도 제나로의 Di pescator ignobile(미천한 어부의 아들로)도 둘이 같이 부르는 사랑의 이중창 씬 전체가 몽땅 다 혼절할 듯 아름답고 오르시니의 축배의 노래인 Il segreto per esser felici(행복해 지는 비결)도 질투하는 남편의  Vieni, la mia vendetta!(복수여 나에게 오라)도 정말 훌륭하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도.

이 극의 참으로 비극적인 점은 바로 남자들의 권력암투의 희생양이었던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그 보르자 가문의 법칙을 내재화해서 자기를 모욕한 자들, 기실 보르자 가문의 암투의 피해자들을 응징하고 안위를 확보하려고 하는데, 그 와중에 자신의 아들까지 희생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 내가 니 엄마다 한 마디만 해줬어도 아들을 무사히 피난시킬 수 있었을텐데 마지막에, 아들의 죽음 직전에 가서야 사실을 말하는 그 여자의 아집이다. 그것은 아마 그녀의 트라우마일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선택한 것은 아니다.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젊은이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차마 사실을 이야기하지 못 하고, 이대로 헤어지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아들의 친구들이 온통 죽은 전남편들의 가족과 친지이다.;;; 그때야 경황이 없어 그랬다지만 이후 진행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고 위험한 소굴-페라라로부터 아들을 떠나게 하기만 하면 될거라는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이 젊은이는 대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본적 없는 엄마를 그리워 하며 자란 그에게 친구들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를 못 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테너의 마지막 아리아가 정말 끝내주는데, 나는 이 장면을 그루베로바와 브레슬릭 버전에서만 보았고 유투브에 있는 다른 공연들에서는 생략이 되어있었다. 정말 이해가 안 간다. 최고로 끝내주는 장면인데 말이다. 다 죽어가던 사람이 노래 한 곡조 뽑고 가는게 오페라에서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아니다. 전혀 아니다...

Madre, se ognor lontano visi
al materno seno,
che a te pietoso Iddio
m'unisca in morte almeno.
Madre, f'estremo anelito
ch'io spiri sul tuo cor 

어머니 우리는 멀리 떨어져
저는 당신 품을 알지 못 하고 컸지만
자비로우신 신은 우리를 죽음에서만큼은
함께하게 해주셨어요
어머니, 당신의 품에서
마지막 숨을 쉬어도 될까요?

원망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는, 순수한 기쁨이라고 나는 확신한다.(슬픔조차 아니다.) 왜냐면, 자식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었다. 최초에는.

무조건적인, 절대적인 사랑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먼저 아기에게서 나온다. 정말? 우리가 지금껏 들어온 어머니의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읊어대는 모든 가락은 나이먹은 남자들이 생산해낸 글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 엄마였던 사람의 시각이 훨씬 정확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겠지만.

벌써 십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나는 나의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아들이 자다 말고 엄마! 하고 소리쳐 부르던 순간을 기억한다. 안방에 아이를 재워놓고 나는 부엌에서 이제 좀 마음을 놓고 식은 미역국에 밥을 먹고 있던 중이었다. 그 와중에 어두운 방 안에서 날아온 외침에 나는 가슴을 찔렸다. 그때 비로서 나는 엄마가 된 것이다.

아기의 절대적 사랑이 엄마의 절대적인 사랑을 생겨나게 한다. 아기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왜냐면 엄마는 아기의 삶을 위한 모든 것, 삶 자체와 거의 등치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아직 분화되지 않은, 생존본능과 분화되지 않은, 막연하지만 막강한 감정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 위태로운 듯 느껴질 때 아이는 전심전력을 다해 그 사랑을 지켜려고, 얻으려고 한다. 우리가 가진 수많은 정신병들과 그보다 사소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버릇들은 상당수가 어려서, 8살 되기 전에 생긴다. 그 사랑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조금 나빠지고 조금 억울하고 그런 것쯤은 다 무시했던 것이다.

그 강렬한 사랑은 오랜 시간을 같이 살면서 한 독립된 인간으로 커가는 와중에 무뎌지고 잊혀지고 많은 다른 것들로 대체가 된다. 보통은. 그러나 이 젊은이의 경우는, 나폴리의 한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자라나다가 어느날 자기의 어머니가 귀부인이고 권력암투의 희생자로서 자기를 멀리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을 알게 된 이후 어머니를 완전 숭배하게 되었고, 그래서 다 큰 젊은이인데도 그 사랑은 아주 강렬한 형태로 남게 되었다...고 추정해 본다.

마지막 남주의 죽음씬은 테너도 정말 잘 하지만 연출이 진짜 끝내준다. 처음 루크레치아를 만날 때 홀딱 반해 버린 제나로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제가 당신보다 더 사랑하는 단 한 명, 아직 본 적 없는 어머니에 대해 고백하는데 이 때 그는 천진무구한 소년 같은 몸놀이를 한다. 그리고 죽어가면서 다시 그는 그 위태위태해 보이는 몸놀이를 하는데, 그립던 어머니와 드디어 만난 그가 보이는 천진한 기쁨이자 바라보는 사람에게 몹시 애처로움을 자아내는 몸짓이다. 무대 뒤쪽으로 멀어져가는 모습이 하늘로 날아가는 그의 영혼 같기도 하다. 이 장면은 루크레치아와 제나로의 첫만남과 끝, 둘의 모든 기쁨과 슬픔, 기대와 절망, 사랑을 담고 있다.

정말 끝내주는 연출이다. 내가 오페라를 많이 보지는 못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연출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잠시 묵상...

Com'e bello 노래 듣고 이 오페라에 마음이 끌리시는 분들은 꼭 그루베로바와 브레슬릭 버전으로 보시길 강추한다. 르네 플레밍 그런거 필요없다. 좀 현대적인 연출이라 나도 처음엔 약간 꺼려질까도 했는데 브레슬릭의 열연을 보고 나면 그런 마음이 다 사라지실 것이다. 실은 나도 그루베로바 때문에 선택했는데 보고 나니 결론은 <루크레치아 보르자>는 테너를 기준으로 택해야 한다는...!

그리고 실은, 나도 음반은 몽셰라 카바예와 알프레도 크라우스를 샀지만 계속 듣다 보니 크라우스보다 브레슬릭이 훨 나아서...(크라우스는 너무 성숙한 남자같은 느낌이다. 미숙하고 열정적인 젊은이의 느낌이 부족하다. 미안해요, 크라우스!-0ㅜ;;)  극적인 표현도 너무 차이가 나서... 귀찮아도 유튜브를 애용한다.

Edita Gruberova - Com'e bello - Lucrezia Borgia - 2009